essay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

죽음을 무서워하는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 앞에서 그런 설득은 보통 무력하다. 다만 죽음에 대해 인류가 2500년 동안 정리해 둔 몇 가지 생각을 함께 들여다보고 싶을 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두려움은 — 그 정체를 똑바로 보고 나면 — 아주 조금씩 옅어지는 성질이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

먼저 정직해지자. 우리는 정말로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려움의 대부분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근처의 것들이다.

  • 죽기 직전의 통증과 호흡 곤란
  • 사랑하는 사람들이 받을 슬픔
  • 못 다 한 일, 만나지 못한 사람
  • 내가 사라진 뒤에 나 없이 흘러갈 세상의 시간

이 항목들 중에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 정의상 — 내가 경험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일 수 있을까? 이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두려움의 절반은 여기에서 풀린다.

에피쿠로스의 한 줄

기원전 4세기, 에피쿠로스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이렇게 적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다.

처음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말장난 같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머릿속에서 굴려보고서야 알았다. 이건 말장난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건이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진지한 질문이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끔찍한 일들 — 통증, 외로움, 어둠, 상실 — 은 모두 경험되어야 끔찍하다. 경험할 주체가 없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다. 캄캄한 어둠도, 그 어둠을 볼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영원한 무의식이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자의 눈으로 그 무의식을 상상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태어나기 전의 영겁

루크레티우스라는 또 다른 사상가는 이 문제를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풀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 수십억 년의 시간이 있었다. 우주가 만들어지고 별이 태어났다 죽고, 지구가 식고, 생명이 출현하고, 인류가 1만 년을 살아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당신은 없었다.

없음이 당신에게 끔찍했는가? 공포스러웠는가? 외로웠는가?

당연히 아니다. 없는 사람에게는 없음이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 같은 논리로 반대편을 보자. 당신이 죽은 뒤에도 수십억 년이 흐를 것이다. 그 시간이 당신에게 끔찍할 이유는 — 정확히 같은 논리로 — 없다.

태어나기 전의 영겁이 평온했다면, 죽은 뒤의 영겁도 평온하다. 우주는 우리가 등장하기 전에도 평화로웠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평화로울 것이다. 우리는 그 한가운데에서 잠시 깨어나 빛을 본 손님일 뿐이다.

잠은 왜 무섭지 않은가

매일 밤 우리는 죽음의 연습을 한다. 의식이 사라지고, 시간이 건너뛰고, 자아가 정지한다. 깊은 잠은 — 신경과학적으로도, 현상학적으로도 — 죽음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다. 차이는 단 하나, 깨어남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런데 우리는 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영한다. 피곤한 하루의 끝에 침대에 눕는 그 순간을 축복으로 여긴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죽음의 어둠이 무서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어둠 그 자체는 매일 밤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평화로 받아들이니까. 두려움의 진짜 정체는 어둠이 아니라, 깨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 있는 자의 상상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 위에서 본 것처럼 — 깨어나지 못할 사람에게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이 모든 논증을 받아들여도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자. 두려움은 머리로 풀리는 게 아니라 살아내며 풀리는 것에 가깝다.

다만 두려움의 지도가 바뀐다.

우리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것 실제로 두려워해야 할 것
죽음 자체 (경험할 수 없음) 죽기 전까지의 — 잘 살지 못할 가능성
의식의 소멸 (잠과 다르지 않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미안함
사후의 어둠 (태어나기 전과 같음) 못 다 한 일들에 대한 후회

오른쪽 항목들은 모두 살아 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다.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변형된 모습이다.

이 통찰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따뜻한 안도감을 준다 — 우리가 진짜 마주해야 할 일은 죽음이 아니라 오늘 하루라는 깨달음. 그것은 다행히도 우리가 직접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이다.

메멘토 모리, 그러나 다른 의미로

라틴어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표현이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 이 말은 보통 음울하게 해석되지만, 원래의 뜻은 정반대다.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 그래야 오늘을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잘 사는 사람이다.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으면, 시간이 무한하다는 거짓된 위안 없이도,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요하게 받아들이며 살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이 음울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 질문을 진지하게 매일 해본 사람은 — 역설적으로 — 가장 평온하고 가장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된다. 두려움이 풀린 자리에 사랑이 들어찬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두려움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두려움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또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두려움이 아예 없는 사람보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그 안을 들여다본 사람이 더 깊은 평화를 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다.

밤에 잠들기 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한 번만 들여다보기를. 죽음 자체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인지. 답이 후자라면 — 좋은 소식이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방향 표시등이다. 그 표시가 가리키는 쪽으로 한 걸음만 옮기면 된다.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죽음은 우리를 기다린다. 천천히, 무관심하게, 모두에게 똑같이. 그것은 무서운 일이 아니라 그저 사실이다. 그리고 사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일은, 지금 살아 있는 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당신이 오늘 밤 조금 더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 잠은 죽음의 작은 연습이고, 매일 아침 깨어나는 일은 작은 부활이다.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연습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마지막 한 번의 잠도, 그리 두려운 것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