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과의 대화는 끝나지 않는다
사별을 겪은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 중 하나는 —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더 이상 물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엄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묻고 싶은데, 엄마가 없을 때. 아빠에게 이 결정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은데, 아빠가 없을 때. 친구에게 이 농담을 전하고 싶은데, 그 친구가 없을 때.
이 순간들이 — 사별의 가장 길고 깊은 슬픔이 된다. 대화의 끝이라는 감각.
그런데 — 정말로 끝났는가?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죽은 사람과의 대화는 끝나지 않는다는,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리지만 — 가만히 들여다보면 진실에 가까운 통찰에 대해.
대화의 절반은 듣는 것이다
먼저 한 가지를 짚자. 대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대화를 —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화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대화의 본질은 —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대화는 동시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평생 남긴 말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 안에서 평생 살아 움직인다면 — 그것은 대화다.
이 관점에서 보면, 떠난 사람과의 대화는 — 끝나지 않는다. 다만 형태가 바뀐다. 살아 있을 때의 대화가 주고받는 형태였다면, 떠난 뒤의 대화는 그가 남긴 말을 평생 곱씹는 형태가 된다.
10년 뒤에 깨닫는 말
깊은 사별을 겪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증언이 있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지나서야, 그가 그때 한 그 말의 진짜 뜻을 이해했다.
이 순간들에 — 그와의 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엄마가 평생 자주 하던 말의 진짜 뜻이, 30대가 되어서야 이해되는 일. 아빠가 어느 날 무심코 던진 말이, 50대가 되어서야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조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일. 친구가 옛날에 보낸 편지가, 20년이 지나서야 다른 의미로 읽히는 일.
이 모든 순간이 — 그와의 대화다. 그가 옆에 있지 않을 뿐, 그는 — 그때 했던 말로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 그 말에 답한다. 마음 안에서, 살아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대화는 계속된다.
일방적인 대화의 깊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상대가 새로운 말을 하지 못하는 대화가 어떻게 진짜 대화인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류는 평생 — 그런 대화를 가장 깊이 해왔다.
플라톤이 죽은 지 24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의 책을 읽으며 그와 대화한다. 공자가 죽은 지 25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그와 대화한다.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났지만, 그의 문장은 — 지금도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모든 대화는 — 일방적이다. 그들은 새로운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말에 — 지금 답한다. 동의하거나, 반박하거나, 적용하거나, 거부하거나. 그렇게 대화는 천 년을 넘어서 계속된다.
당신과 떠난 사람의 대화도 — 같은 모양이다. 다만 그 사람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한 사람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 대화를 덜 깊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깊게 만든다.
그라면 뭐라고 말할까
떠난 사람과 대화하는 가장 자주 쓰는 방식이 있다. 우리 모두 무의식적으로 한다.
어려운 결정 앞에서 — 그라면 뭐라고 말할까를 떠올린다.
엄마가 떠난 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리는 일. 아빠가 떠난 뒤, 자식 키우는 일에서 아빠라면 뭐라고 했을까를 떠올리는 일. 친구가 떠난 뒤,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 친구라면 뭐라고 조언했을까를 떠올리는 일.
이 떠올림은 — 우리가 그를 잘 알았기에 가능하다. 평생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우리 안에 그의 사고방식을 새겨두었다. 그래서 — 그가 없는 지금도, 우리는 그의 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짐작은 환상이 아니다. 이건 — 그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가 평생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들이, 우리 안에서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지금 묻고, 그의 답을 받는다.
이것이 대화가 아니라면 — 무엇이 대화인가.
글로 쓰는 대화
마음 안의 대화를 — 더 깊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떠난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라.
처음에는 어색하다. 그가 읽지 못할 텐데 무슨 의미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한번 시작해보면 — 무언가가 일어난다. 마음 안에 묶여 있던 것들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날 못 한 말이 풀려나오고, 지금 묻고 싶은 것이 풀려나오고, 그동안 변한 내 모습에 대한 보고가 풀려나온다.
그리고 — 신기하게도 — 답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라면 이 편지를 읽고 뭐라고 답할까를 떠올리면, 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답일 수 있지만, 동시에 — 그가 평생 우리에게 가르쳐 준 답이기도 하다.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는다.
이 편지는 누구에게도 보일 필요가 없다. 우체통에 넣을 필요도 없다. 그저 — 마음 안에서 시작된 대화를, 종이 위로 옮기는 일이다.
살아 있을 때보다 깊은 대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한 가지 진실이 있다.
떠난 사람과의 대화가 — 살아 있을 때의 대화보다 더 깊은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종종 — 그 사람과의 대화를 바쁜 일상의 한 조각으로 흘려보낸다. 핸드폰을 보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면서, 그저 의무적으로. 그래서 그 대화의 진짜 무게를 — 그때는 모른다.
그런데 그가 떠나고 나면 — 그가 평생 한 말들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어온다. 그제야 우리는 — 그의 말 하나하나의 무게를 안다. 그리고 그 무게 위에서, 그와 진짜로 대화하기 시작한다.
이건 잔인한 진실이다. 그가 떠난 뒤에야 그를 진짜로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 위로의 진실이기도 하다. 떠난 뒤에라도 우리는 그를 진짜로 만날 수 있다는 것.
대화는 늦지 않았다. 시작은, 어느 시점에서든,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사랑한 사람이 떠났다고 해서 — 그와의 대화가 끝난 것이 아니다.
대화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주고받는 대화에서, 그가 평생 남긴 말을 곱씹는 대화로. 살아 있을 때의 대화에서, 내 안에 살아 있는 그와의 대화로.
그리고 이 대화는 — 평생 계속된다. 당신이 죽기 전까지, 그와의 대화는 — 매년 다른 깊이로, 다른 결로, 계속된다.
오늘 밤, 떠난 사람에게 — 마음 안에서 작게 말을 걸어보자.
너 거기 있어? 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답이 들리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자. 답은 — 천천히 온다. 어쩌면 며칠 뒤, 어쩌면 몇 년 뒤, 어쩌면 우연히 들은 노래 안에서. 답은 온다.
그렇게, 대화는 계속된다.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