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노래했다
기원전 4세기 중국, 도가(道家) 철학자 장자(莊子)의 아내가 죽었다.
장자의 친구 혜시(惠施)가 조문을 갔다. 슬픔에 잠겨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갔는데, 도착해 보니 장자는 —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화를 내며 말했다.
"평생을 함께 산 아내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다니, 그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노래까지 부르다니 — 너무하지 않은가?"
장자가 대답했다. 이 대답은 — 동양 사상이 죽음을 다룬 가장 깊은 문장 중 하나로 꼽힌다.
장자의 대답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나도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 그녀는 생명조차 아니었다. 생명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형체도 아니었고, 형체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기운도 아니었다.
흐릿한 무엇 사이에서 기운이 나오고, 기운에서 형체가 나오고, 형체에서 생명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 — 다시 죽음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흐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그녀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평온히 누워 있다. 그런데 내가 그 옆에서 통곡한다면 — 그것은 천명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울음을 그쳤다.
이 대답은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떻게 아내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차분할 수 있는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 이건 차가움이 아니라 깊은 평화에 가깝다.
죽음은 돌아가는 것
장자의 핵심 통찰은 이것이다.
태어남은 오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다.
생명이 영원한 원래 상태가 아니라는 것. 우리는 모두 — 없음에서 있음으로 잠시 건너왔다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비정상이 아니다. 죽음은 원래 상태로의 복귀다. 마치 손님이 잠시 머물렀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 관점은 죽음을 낯선 것에서 친숙한 것으로 바꾼다. 죽음은 우리가 원래 있었던 곳이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이 — 진정으로 끔찍한 일일 수 있을까?
통곡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슬픔이다
장자의 두 번째 통찰은 더 미묘하다.
그녀가 우주의 큰 방 안에서 평온히 잠들어 있는데, 내가 통곡한다면 — 그것은 천명을 모르는 일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풀어보자.
만약 그녀가 진짜로 평온하다면, 통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평온하니까. 통곡은 — 남은 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건 통곡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남은 자가 슬픈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 그 슬픔이 떠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자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떠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긴다. 너무 일찍 갔다, 너무 안타깝다, 그 사람도 더 살고 싶었을 텐데.
장자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가 안타까운 게 아니라, 네가 안타까운 것이다. 그는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안타까움은 남은 자의 몫이지, 떠난 자의 몫이 아니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슬픔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함으로써 — 우리는 떠난 사람에게 부여하는 환상을 줄일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는 없기 때문이다.
노래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러면 장자의 노래는 — 무엇을 의미했을까?
여러 해석이 있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이렇다.
노래는 기쁨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표현이었다.
장자는 아내를 사랑했다. 사랑이 없었다면, 그가 처음에 슬프지 않았다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그는 — 슬픔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통과해 받아들임에 도달하는 길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노래는 슬픔의 부정이 아니다. 노래는 슬픔을 통과한 자리에서 나오는 소리다. 그것은 — 우주의 흐름에 동의한다는 표현이고, 떠난 사람을 그가 가야 할 곳으로 놓아주겠다는 표현이다.
우리에게 남는 것
장자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첫째, 떠난 사람을 너무 동정하지 말 것. 그들은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슬픔은 우리의 몫이지, 그들의 몫이 아니다.
둘째, 죽음을 비정상으로 보지 말 것. 죽음은 비정상이 아니라 순환의 한 단계다. 봄이 여름으로 가듯, 생명이 죽음으로 가는 것은 — 자연의 결이다.
셋째, 슬픔을 통과한 뒤의 받아들임을 두려워하지 말 것. 받아들임은 사랑의 부족이 아니다. 받아들임은 — 슬픔을 온전히 살아낸 사람이 도달하는 자리다. 그곳에는 노래가 있다.
마지막으로
장자가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 이유 — 그것은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다. 슬픔을 통과해서다.
당신이 누군가를 잃었다면, 처음에는 충분히 슬퍼해도 된다. 천 번을 울어도 된다. 다만 — 슬픔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장자는 우리에게 알려주려 했다.
슬픔의 끝에는, 받아들임이 있다. 받아들임의 자리에는, 작은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떠난 사람을 잊는 노래가 아니다. 그 노래는 — 그를 그가 가야 할 자리로 놓아주는 노래다.
언젠가 당신도, 마음 안에서 작게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당신은 알 것이다.
받아들임은 — 사랑의 끝이 아니라, 사랑의 가장 깊은 형태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