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부재가 곧 단절은 아니다

사별을 겪은 사람이 어느 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표정에서 떠난 사람의 표정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좋아하는 음식을 차리다가, 그것이 그 사람이 좋아하던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채는 순간.

이 순간들은 처음에는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가 없는데, 그의 흔적만 남아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 같은 순간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그 흔적이, 그가 여전히 어딘가에 있다는 증거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철학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가장 직관적인 답은 — 육체 안이다. 그래서 육체가 사라지면, 그 사람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답은 너무 좁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람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단지 그의 육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의 말투, 사고방식, 농담의 결, 화내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 이 모든 것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총체는 — 그 사람의 두개골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를 사랑한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복사본이 흩어져 있다. 그가 자주 한 말, 그가 좋아한 음식, 그가 화내던 방식.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동안, 그의 일부를 우리 안에 옮겨심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그

당신 안에는 떠난 사람의 어떤 부분이 살아 있는가?

하나씩 떠올려보자.

  • 무심코 쓰는 말투 중에 그의 말투가 있다.
  • 화날 때 짓는 표정 중에 그의 표정이 있다.
  • 옳다고 믿는 가치관 중에 그가 가르쳐 준 것이 있다.
  • 어려운 결정 앞에서 떠올리는 기준 중에 그가 살았던 방식이 있다.
  •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산책길 중에 — 그에게서 받은 것이 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당신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신경과학적으로, 우리의 성격과 습관은 —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영향으로 실제로 형성된다. 우리가 사랑한 사람의 패턴이 우리 뇌 안에 물리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가 죽어도 그 패턴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는 — 당신의 일부로서 — 함께 살아간다.

"흉내"가 아니다

가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흉내라고 느끼고 부끄러워한다.

"내가 엄마처럼 말하기 시작했어. 엄마 흉내 내는 것 같아서 좀 그렇네."

흉내가 아니다. 상속이다.

흉내는 의식적으로 따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당신이 떠난 사람의 말투를 무심코 쓸 때, 그것은 흉내가 아니다. 그건 그가 당신 안에 남긴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을 자식이 무심코 하는 것은 — 엄마 흉내가 아니다. 그것은 엄마가 자식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일 일이다. 그가 당신 안에 남긴 흔적이 — 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작은 증명이다.

부재 속의 현전

기독교 신비주의에 *부재 속의 현전(presence in absence)*이라는 개념이 있다. 보이지 않는 형태로 함께 있음. 만질 수 없는 형태로 옆에 있음.

이 개념은 종교적 맥락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밤늦게 운전하다가 그라면 이 길을 어떻게 갔을까를 떠올리는 순간. 어려운 결정 앞에서 그라면 뭐라고 말했을까를 떠올리는 순간. 화가 날 때 그가 곁에 있다면 그가 나를 진정시켰을 텐데를 떠올리는 순간.

이 순간들에 — 그는 없는 게 아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있다. 만질 수는 없지만, 분명히 거기 있다.

이걸 환상이라고 부르지 말자. 이건 환상이 아니라, 관계의 다른 형태다. 살아 있을 때의 관계가 육체와 육체의 관계였다면, 떠난 뒤의 관계는 내 안에 새겨진 그와의 관계다. 형태는 다르지만, 둘 다 진짜 관계다.

대화는 계속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떠난 사람과의 대화는 끝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새로운 말을 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 그가 평생 우리에게 들려준 말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그와 대화한다.

10년이 지나서야 그때 엄마가 한 그 말의 진짜 뜻을 깨달을 때가 있다. 20년이 지나서야 그 친구가 했던 그 농담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될 때가 있다. 이런 순간들에 — 우리는 그와 지금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는 양쪽이 동시에 말해야 하는 게 아니다. 한쪽이 평생 남긴 말들을, 다른 쪽이 평생 곱씹는 일도 —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는, 양쪽이 다 살아 있을 때보다 — 더 깊은 대화가 되기도 한다.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재는 곧 단절이 아니다. 그가 떠났다고 해서, 당신과 그의 관계가 끝난 게 아니다.

관계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만질 수 있는 관계에서, 만질 수 없지만 내 안에 새겨진 관계로.

당신 안에 살아 있는 그를 — 알아봐 주자. 거울 속 표정에서, 무심코 한 말에서, 좋아하는 음식에서, 옳다고 믿는 가치에서. 그를 발견할 때마다, 작게 인사해보자.

너 거기 있구나. 잘 지내?

이상하게 들리는가? 한 번 해보면 안다.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 진짜로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한 — 우리는 그를 잃은 게 아니다. 다만 그를 다른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